• 나는 언젠가부터 노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던 일을 없었던 일이라고 여겼다. 그리고 그렇게 생갓할수록 정말 없었던 일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.
    -33쪽, <탐페레 공항>
    나는 왠지 모르게 긴장하면서 입을 열었다. 이때만큼은 틀린 영어 문법을 쓰고 싶지 않아 오래오래 문장을 머리에서 굴리다 말했다.
    아주 오래전부터 다큐멘터리를 좋아해 왔다고.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, 오직 이것밖에 없는 것 같다고.
    "사랑에 빠졌군요."
    "네, 사랑. 아마도요."
    -22쪽

     


    단편 소설집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첫번째 이야기는 첫번째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.
    내가 읽는 단편집의 첫번째 이야기는 어떻게 매번 내 상황과 맞아 떨어지거나 흡입력이 굉장한 이야기뿐일까?
    이번에 읽은 <여행하는 소설>의 첫번째 이야기 <탐페레 공항>도 그러했다.
    책 뒷면에서는 <탐페레 공항>에 대해 '꿈을 재발견하는 여행'이라고 설명하고 있다.
    주인공은 탐페레 공항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노인을 만난다. 그와 꿈에 대해 대화하며, 어렸을 때부터 뚝심있게 꿈꿔 온 멋진 다큐멘터리 피디가 되어 오로라를 찍기 위해 다시 핀란드에 방문하겠노라고 다짐한다.
    그러나 한국에 돌아가서 주인공이 마주한 건 차가운 현실과 거듭되는 실패 뿐.
    주인공은 공항에서 만난 노인이 보내준 오로라 엽서에 답장하는 것을 애써 외면한다.

    어차피 늦은 거 좀 더 한가해지면 답장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. 그러자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. 편지에 대해서는 되도록 잊어버리려 노력했다.
    (중략)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초라하다고 여겨질 때였다. 주로 아침 방송의 십 분짜리 코너를 제작했는데, 작가들이 써 준 대본대로 시키는 대로 찍고 편집했다.
    -29쪽, <탐페레 공항>

     


    마지막에 주인공은 시각을 잃기 전 포토그래퍼였다던 노인이 공항에서 찍어준 자신의 사진이 혹여 구겨질까 시리얼 박스를 오려 붙이고 연필로 구부리지 말라고 쓴 것을 한참 뒤에서야 발견하고 눈물을 흘린다.
    주인공에게 노인이 보낸 엽서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는 부푼 꿈 그 자체였던 것 같다.
    노인과 그가 보낸 엽서를 생각하면 꿈을 멋지게 이루지 못하고 현실에서 이런 일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자꾸 더 초라해지는 것만 같아 꺼내보지 못한 게 아닐까.
    처음 만난 당시 100세 가까이였던 노인이 '죽었을까봐' 답장을 차일피일 미룬 것도, 더 이상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는 꿈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.
    마지막에 주인공이 허겁지겁 연락했을 때 노인이 죽은 게 아니라 '자고 있다'고 한 것도 주인공의 꿈이 죽은 게 아니라 그저 잠들어 있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.

     

    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o8BvRqppp-o

    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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