원래 <칵테일, 러브, 좀비>를 한 번 더 읽으려다가 오랜만에 새로운 단편모음에 도전하자는 결심이 섰다.
구글에 '단편 소설 추천'을 검색했는데 정세랑, 박상영 등 작가진이 탄탄한 소설이 하나 떴다.
다양한 상황과 형태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다.
 

 
무작정 도서관에 달려가서 이 책을 본 순간 뒷표지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.
대학 때 정보학개론과 분류법 강의에서 배운 주제색인과 폭소노미가 퍼뜩 스쳤다.
폭소노미, 즉 태그를 활용해서 단편소설의 주제들을 적어놓은 뒷표지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.

 
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최진영 작가의 <첫사랑>이다.
역시 단편 모음집에서 첫번째를 차지하는 작품은 항상 이유가 있다.
독백 중에 여운이 남는 문구들이 많았다.
 

메마른 냄새는 J의 것. 
작은 나무처럼 웅크린 채 울던 J.
뒷모습만으로도 완전한 J.
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J.
늘 나를 두리번거리게 하는 J.
-28쪽

 
사랑은 항상 아무런 예고없이 찾아온다.
'나'도 교실에서 친구의 부름에 뒤돌아보는 J의 미소를 보고 한순간에 사랑에 빠진다.
말을 걸 용기도 J를 도와줄 용기도 없으면서 하루종일 J만 생각한다.
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그 모습이 마치 학생 때 나를 보는 것 같았다.
 

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이 뭐냐고 물어보고 다닌 적이 있다.
모두 다른 말을 했다.
즐거운 거야.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지. 
(중략)
그 사람과는 뭐든 할 수 있겠다는 마음? 일단 자 봐야 아는 거야.
(중략)
가장 많이 들었던 대답은,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하느냐는 말이었다.
나 역시 그 말에 공감했다.
하지만 누군가가 십 년 전의 내게 사랑이 뭐냐고 물었다면,
나는 분명하게 대답했을 것이다.
그건 J야. J의 미소야.
-29쪽

 
<가슴 뛰는 소설>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상황에 비추어 '사랑'을 다르게 정의한다.
사랑은 마냥 좋아서 가슴이 뛰는 감정일까?
대화도 못 해봤지만 계속 생각나는 J가 사랑일까, 매일을 함께 보내는 Y가 사랑일까.
 
'나'가 회상하던 학창시절 산을 오르던 J의 뒷모습.
이루어지지 않아 어른이 되어서도 사진으로만 추억하는 첫사랑.
<첫사랑> 마지막 줄을 읽으며 왠지 모르게 J는 그때 목숨을 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.
 
 

여섯 번째 여자의 목덜미에는 타투가 있었다.
(중략) 
"너 그거 할 때 결혼할 생각은 하나도 안 했냐?
진짜 보기 싫어. 철들었으면 레이저로 지우든가 해야지."
(중략)
식장에 들어가기 직전에 여자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돌아보았다.
역시나 멋진 타투였고 드레스와도 잘 어울렸다.
내 몸은 내 거야.
결혼을 한다고 해도 내 몸은 내거야.
-163쪽

 
정세랑 작가의 <웨딩드레스 44>는 굉장히 특이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.
한 웨딩스레스를 거쳐간 여자들의 결혼에 엮인 개인 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.
성 결정권, 아직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가부장적인 부분들, 담습되는 좋지 않은 관례들.
읽으면서 꽤 많은 여자들의 입장에 공감하기도 했고,
이렇게 사회구조를 소설에 녹여 비판할 수도 있구나 감탄하기도 했다.
 

남자가 잠결에 실수로 여자를 때렸다. 
팔꿈치로 눈두덩을 힘껏 친 것이다. 여자는 멍이 들었다.
(중략)
4일째가 되어서야 여자는 깨달았다. 
여자는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. 두려운 것이었다.
그때까지 인식하지 못했지만 두 사람 사이엔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있었다.
나중에 남자가 성격이 변해서 때리고 목을 조르면 어떡하지?
최악의 상상들의 연이었다.
-174쪽

 
스물여섯번째 여자는 남녀의 물리적인 힘의 차이에 두려움을 느낀다.
이것은 어쩌면 가정 내 남녀 권력의 차이가 될 수도, 사회구조 속 남녀 권력의 차이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.
나는 왜인지 몇년 전 우리나라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많은 여성 혐오 범죄들이 떠오르기도 했다.
 
간만에 너무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.
내용이 잊혀질 때 즈음 다시 한 번 읽고 싶다.
 
 
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vVrFyMDMrlM

 
알아 내 맘에 조용히
문을 두드리면
눈에 뿌옇게 고여버린
널 흘려보내야 해

'책장' 카테고리의 다른 글

하이큐 쓰결 goat하다  (0) 2024.05.09
파묘, 2024  (0) 2024.03.04
재와 물거품 / 김청귤  (0) 2024.03.04
나의히어로아카데미아 6기  (0) 2024.02.19
삶을 위한 수업 / 마르쿠스 베른센  (0) 2024.02.09